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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 고전15:31 (2019.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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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날짜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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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 고전15:31
2019. 6. 30 주일 낮

2살 때는 똥오줌을 가리는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고 합니다. 3살이 되면 이가 나는 게 자랑거리, 12살이 되면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 18살이 되면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 20살이 되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35살이 되면 돈이 많은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 50살 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때부터는 자랑거리가 거꾸로 된다고 합니다.

50세 때는 돈이 많은 게 자랑거리, 60세 때는 그때까지도 사랑을 하는 게 자랑거리, 70세 때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75세 때는 친구들이 남아 있다는 게 자랑거리, 80세 때는 이가 남아 있다는 게 자랑거리, 85세 때는 대소변을 가릴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가 된다고 합니다. 결국 인생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똥오줌 가리는 것 배워서 자랑하며 살다가 대소변을 내손으로 가리는 것을 자랑하다는 것으로 마감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육체에 속하는 것들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육체를 따라서, 혹은 육체에 속하는 것들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였고, 날 때에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였고, 바리새파에 속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육체를 따라 자랑하려면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 지파입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길리기아 다소에서 당시 최고 문화인 헬라 문화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최고의 랍비인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당시의 모든 식민지 백성들의 선망이 되었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많은 자랑거리를 다 내려놓고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그 많은 자랑거리가 그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데 앞장서는 인물이 되었을 뿐입니다.

행8:1-3 사울은 그가 (스데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이렇게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언제 변화되었습니까?
행9:17-21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사울이 성령 충만을 받고 난 이후에 나타난 첫 번째 변화가 무엇입니까?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이 아니니아의 안수를 받고 성령 충만을 받은 이후에 나타난 변화는 성경이 밝히 깨달아져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어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괴로워서 절규했던 것입니다.

롬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러분, 예수를 주로 믿었는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왜 안되는 것입니까?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옛 사람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옛 사람은 배웠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과 도덕으로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고행을 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힘쓰고 애쓴다고 변화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지킬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몰라서 못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하지 않기 때문에 못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옛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에 못 지키는 것입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그런데 문제는)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여러분,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이 되어
언제나 옛사람, 자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게 했던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중에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며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가 크게 나타났던 교회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명한 사도 베드로와 아볼로가 목회를 했던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분쟁과 싸움으로 사도 바울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고전1:11-12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뿐만 아니라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하고 다른 지체를 깔보고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네가 받은 방언은 랄랄랄라 애기 방언이고 내가 하는 방언은 유창한 방언이야. 내 은사가 더 뛰어나 하는 식으로 자기 자랑만하고 다른 지체를 멸시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던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의 살림을 도맡아 했던 충성스러운 일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라고 화해의 특별 당부를 남겼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로가 자기의 충성만이 옳다고 믿고 자기 방식만 선하다고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 자아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모든 일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상대를 용납하거나 양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뜻마저 꺾고 마는 것, 그것이 옛사람이 죽지 않은 나, 자아가 펄펄 살아있다는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사기는 사사시대 사람들이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았던 원인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자아가 벌이는 일입니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시대에는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이 소신 있고 줏대 있는 당당한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생각을 옳다고 여기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날마다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어떤 원로 목사님이 은퇴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자신이 평생 목회하면서 자신의 집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고, 자신의 땅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지만 자기 성질을 뽑아 바친 교인은 한 사람도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웃으며 가볍게 하신 말씀이지만 참으로 새겨들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바쳐할 것은 나의 자아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분명히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을 받은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늘 승리하지 못하고 번번이 패배하는 이유는 내 생각, 내 고집, 내 성질에 예수님이 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쳐서 주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이해가 되든지 이해가 되지 않든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승리한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수11:15 야훼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야훼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다윗이 그렇게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하고 귀하게 쓰임 받은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삼상22: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가 여호수아와 다윗 같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원수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까? 문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순종하지 않습니까?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내 의견,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예수님과 싸워본 일이 있습니까? 만약 예수님과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기십니까? 여러분이 이깁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그게 무슨 질문이냐?’고 하며 이 질문 자체를 의아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헌신해라 봉사해라 용서해라 등 무엇 하나를 시키시려면 얼마나 많이 애쓰고 기다리셨습니까? 얼마나 어려우셨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거절하거나 외면하거나 차일피일 미루는 우리의 태도가 예수님과 겨루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 성령 충만을 받아 성령의 권능과 은사가 임하여 주의 일을 하는 사람 중에도 인격이 미숙하고 교만한 사람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옛사람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한 성령님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경험하는 것과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육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의 육체를 죽여야 합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고후4:10, 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모의 손에 자란 한 소녀가 있습니다. 고모는 결혼도 않고 어린 조카들을 길렀습니다. 어느덧 소녀는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고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소녀는 고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춘기 조카는 조카대로 잔소리가 심한 고모에게 반항심이 생겼고, 고모 역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교회에 가는 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고모에게 잘못한 일을 회개하고 잘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집에만 가면 좀처럼 마음먹을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고모가 조금만 잔소리하고 야단쳐도 화를 참지 못해 고모에게 대들거나 화를 냈고,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에서 소녀는 목사님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라는 말씀이 소녀의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고모를 만나니까 안 되는 거야.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데 예수님이 고모를 만나주시면 되겠구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 앞에 서자 소녀는 다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모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야단을 칠 것이고, 그러면 자기도 참지 못하고 또 싸울 것만 같았습니다.

소녀는 현관문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고모를 만나면 오늘 또 싸울 것 같아요. 예수님이 고모를 만나 주세요. 저는 죽었고, 예수님이 제 안에 살아 계시잖아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문을 열자 역시나 고모는 벼르고 있었다는 듯이 소녀를 맞았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너 교회 갔었지?’하고 무섭게 야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녀의 눈에 야단치는 고모의 무서운 얼굴은 안 보이고, 어느새 주름이 잡히고 흰머리가 난 늙은 고모의 모습이 들어온 것입니다. 조카들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쓸쓸히 늙어가고 있는 지치고 여윈 고모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소녀는 너무 마음이 아파 고모를 와락 끌어않았습니다.
“고모, 얼굴에 왜 이렇게 주름이 많아? 언제 이렇게 흰머리가 났어? 고모, 우리 때문에 이렇게 늙어 버렸어..”

어린 조카가 자신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하자 고모의 가슴도 갑자기 뜨거워졌습니다. 평생 조카들을 위해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살아온 고모에게 얼마나 많은 슬픔과 한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조카가 자기를 끌어않고 그렇게 펑펑 울자 고모의 가슴에서 응어리 진 것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고모를 깊이 만나주셨고, 그 후 고모 역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겉모습은 분명히 옛날 남편 그대로이지만 자아가 죽으면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남편이 아닙니다. 남편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 아내에게 그보다 큰 행복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교회에 나와서 “주님, 내 남편 좀 만나주세요.”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는데, 집에 가기만 하면 바가지 긁고 온갖 성질 다 부리면 남편은 성난 아내의 모습은 보아도,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펄펄 살아있는 아내의 자아에 가려 예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보람은 자식이 잘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믿음을 가진 부모는 내 자녀가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생활 잘하기를 소원합니다. 아무리 윽박질러도 소용없던 자녀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녀가 예수님을 만나도록 할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모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죽고 예수님이 살면 됩니다. 부모님의 인격과 삶이 교회와 집에서 판이하게 다를 때, 자녀들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런 모습을 볼 때 자녀는 신앙을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자아가 죽은 모습을 보인다면, 자녀는 부모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저는 부모님을 통해서 믿음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날마다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력하여 순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력하여 순종하려고 하면 힘들어서 못합니다. 노력하여 순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내 힘으로 순종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죽으려 하는 사람은 죽은 척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곁에 와서 건드려보면 화들짝 일어나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몇 번은 참습니다. 그러다가 폭발하니까 더 크게 화를 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죽으려고 하니까 속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는 믿음으로 취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어야 비로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역사하십니다. 자신의 생각, 감정, 계획, 판단이 죽으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힘쓰고, 애쓰고, 발버둥 쳐도 안되던 것이 내가 죽으니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지식으로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자신이 죽으니까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표시가 납니다. 지금 내 옆에 시체가 누워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시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자극과 변화에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아가 죽은 사람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속이 뒤집히는 말을 하고, 억울한 말을 해도 죽었고, 칭찬에도 우쭐하지 않고 죽은 사람이 진짜 죽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세상을 벗어났거나 세상과 관계를 끊었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이나 시스템에 얽매어 살지 않고 그보다 더 큰 하나님 나라의 법칙에 의해 내 삶이 움직여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으면 우리가 권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능력과 은사는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고 그 분의 일을 행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거나 축복과 형통을 위해 성령을 받고자 하는 경우에는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육체를 죽이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날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롬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 충만을 받아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승리하게 됩니다. 날마다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날마다 승리하게 됩니다. 이 승리를 맛본 사람은 자랑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날마다 성령 충만을 받아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 예수님이 여러분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날마다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 결과 날마다 승리하시고, 그리하여 사도 바울 같이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