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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오신 아기 사9:1-7 (2018.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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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날짜18-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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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오신 아기 사9:1-7
2018. 12. 23 주일 낮

오늘 말씀은 BC 8세기경 선지자 이사야가 전한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소망이 보이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사8: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당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국토는 폐허가 되고 좀 똑똑하여 앗수르에 반역을 꾀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반역의 싹을 자르겠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땅에 남은 것은 고아와 과부, 가난과 절망 뿐입니다.

남 유다 또한 아하스 왕이 우상 숭배를 한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무려 4번 이상 침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신흥 강국인 앗수르를 찾았습니다. 그것을 본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8:6-7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리하여 북 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 망했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남 유다 또한 BC586년에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토록 버려두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실 일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흑암을 몰아내시고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사9:1-2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이스라엘 서북쪽 해안지방으로서 지리적으로 유럽, 중동, 아프리카를 잇는 길목에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는 세계열강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애굽, 아람, 앗수르, 바벨론. 이런 나라들이 전쟁을 하게 되면 꼭 이 땅을 거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이 강할 때에는 주변 나라를 지배하기 좋은 위치였지만, 자신들의 힘이 약할 때에는 주변 나라에 침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위치였던 것입니다. 그런 지정학적 위치에 있던 그들이 범죄하여 앗수르의 침략으로 초토화 되었습니다.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은 이 땅을 점령하고 많은 사람을 앗수르에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을 그곳에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로서 혼혈아가 많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멸시를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 지역을 부를 때 “이방의 갈릴리여” 라고 불렀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였느니라”고 무시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의 갈릴리를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들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가장 소외되고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생명의 빛이 비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을 찾아가셔서 소망의 빛, 생명의 빛,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한 이후, 남 유다 또한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이후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무자비한 통치를 받으면서 짐승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흑암과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불화로 인해 말 못할 고민과 걱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불만과 정욕, 미움과 시기심, 열등감의 사슬에 매여 창살 없는 감옥 속에서 고통당하여 살아갑니다.

우리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형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요, 우리 각자는 언제 호출되어서 불려 나갈지 모르는 사형수들인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는 생명의 빛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죄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빛이 비추었습니다. 큰 빛이 임하였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가랴는 성령 충만을 받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눅1:78-79 이로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는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여기서 사가랴가 예언한 돋는 해는 누구를 지칭하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성탄절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의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요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태양이 떠오르면 어두움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듯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한 자마다 내면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밝고 빛나는 인생을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둡고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삶을 살던 우리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맑고 밝고 환하고 희망찬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복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즐거움을 주십니다.

사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 짧은 구절에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무려 4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700년 동안 강대국의 통치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의 노래들을 들어보면 아주 슬프고 어둡습니다. 마치 일제 시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노래들이 우수에 젖고 한에 맺히고 슬픔이 가슴에 져며 오는 것들이 많았던 것과 같습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울고 넘는 박달재" "불효자는 웁니다" 주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창성하게 하시며 즐거움을 주십니다. 어떻게 이런 즐거움이 임할 수 있습니까?
사9: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강대국의 압제를 받아 무거운 멍에를 매고, 채찍과 막대기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그들을 주님께서 무겁게 멘 멍에, 채찍, 막대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 날에 백성들은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죄의 멍에로 사람들을 짓누릅니다. 패배의식, 열등감의 채찍으로 내리칩니다. 정죄감, 수치심의 막대기로 때려서 기를 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죄악의 멍에를 벗겨 주십니다. 그리하여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이 기뻐 뛰게 해 주십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과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고전15: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7년 동안 미디안의 지배를 받아 신음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300명 용사를 사용하여 13만 5천명의 미디안 군대를 섬멸했습니다. 우리 또한 기드온처럼 심히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복음의 능력으로 원수 마귀의 멍에, 채찍, 막대기를 꺾을 수 있습니다.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다섯 남편에게 채이고, 동네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 길러 갈 때, 물동이가 천근만근 무거웠을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다시는 여기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영생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여인의 메시야, 그리스도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을 무겁게 짓누르던 멍에가 순식간에 벗겨졌습니다. 여인은 심령이 새처럼 가벼워졌습니다. 한 많은 물동이를 두고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여인의 변화를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사마리아 땅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영혼들을 추수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쭉정이 같던 인생이 추수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넘치게 되었습니다. 죄로 죽어가던 영혼들을 구원해서 영혼을 추수하는 기쁨보다 더한 것은 없는데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이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또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 땅에 모든 전쟁을 폐하시고 진정한 평화의 세계가 도래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엄청난 역사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다같이 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빛을 비추고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고 군인들의 갑옷을 불태워 버리려면 대단한 지도자가 나와야만 할 것 같습니다. 뛰어난 식견과 탁월한 능력과 외교술을 가진 지도자가 나와야만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한 아기를 통해서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한 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한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라고 할 때 '주셨다'는 의미는 '태어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본래부터 계셨던 분을 보내주셨다'는 뜻입니다. 즉 한 아기로 오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인데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아기의 모습으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는 보통아이가 아닙니다.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였다고 하였습니다. '정사'는 'authority'로서 권세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시기 때문에 흑암의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고,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고, 피 묻은 복장들을 다 불태우실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인자하고 마음씨가 좋아도 힘이 없으면 우리인생들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록 그 모양은 한 아기요, 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지만 그 어깨에 정사를 메고 오시기 때문에 사단의 통치를 폐하시고 능히 새로운 메시야왕국을 건설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이름을 가지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기묘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처녀의 몸을 통해 잉태된 것이 기묘합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생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기묘합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도 기묘합니다.

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그 사람이 변화되는데 이 또한 기묘합니다. 무기력하던 자가 담대하게 됩니다. 추한 인생을 살던 자가 거룩하게 됩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자가 한 영혼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헌신적인 사람이 됩니다. 아무런 꿈이 없이 살던 자가 큰 비젼을 품고 개척하며 도전하는 인생을 삽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모사가 되십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wonderful counsellor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모두 counsellor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모두 우주만한 내면문제를 안고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복잡한데 모사가 없기 때문에, 지혜가 없기 때문에 괴로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누군가에게 나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위로를 받고, 문제를 해결함 받고 싶은데 그럴 대상이 없습니다. 간혹 어떤 친구나 신앙 선배가 내 문제를 이해해 줄 것 같아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쏟아 놓아 보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상처만 받고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부터는 마음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좀처럼 내면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여인은 복잡한 남자관계 때문에 그 내면이 꼬일대로 꼬여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여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대화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잘못 건드렸다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묘한 방법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셔서 이 여인의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나중에는 그녀가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여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끌려 왔을 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므로 바리새인들을 꼼짝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실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진 보물창고와도 같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 어떤 복잡한 인생문제도 다 해결함 받고 변화된 인생,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빌2: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본체가 하나님이시기에 전능하십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소경, 중풍병자, 나병환자, 혈루증 앓는 여인,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려 내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도 살려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할 때 모든 문제를 다 해결 받게 될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아버지로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에 아버지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해 줍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보호자요, 가정의 기둥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버팀목이요, 장래방향을 제시해 주는 등대와도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버지는 뒷동산의 바위 같은 존재요, 시골 마을에 당산나무 같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자녀들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큽니다.

일반적으로 자녀들이 아버지를 바라볼 때 나이에 따라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4살 때는 "우리 아빠는 무엇이나 다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7살 때만해도 "우리 아빠는 참 아는 것이 많아"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 아빠와 선생님 중에서 누가 더 똑똑할까"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2살이 되면서 부터 "우리 아빠도 모르는 것이 참 많구나" 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다가, 15살이 되면 "아버지와 나는 세대차이가 있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0대가 되면 "왜 우리 아버지는 저 정도밖에 못 되는가?" 은근히 무시하고 반발심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아버지는 참으로 중요하면서도 좋은 아버지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맨날 술을 드시고 들어오셔서 어머니와 자식을 때리는 못된 아버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자식들을 괴롭히지는 않지만 대화가 없고 무관심한 아버지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잘해주고 싶어도 세대차이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아버지들도 많습니다.

이래저래 이 땅의 아버지들은 참으로 괴롭습니다. 결국 아버지들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다운 사랑과 깊이 있는 이해심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진정한 아버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의 아버지로서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나이에 따라 실망스럽고 무력해 보이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 능력과 권세와 인품이 동일하신 아버지, 즉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아버지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서 고민을 아뢰고 그 따스한 품에 안기고 그의 사랑과 도우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세상의 왕들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합니까? 히틀러나 스탈린은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짐바브웨의 므가베 대통령은 38년 동안이나 집권하며 독재정치를 하다가 쿠데타로 물러났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핵심측근도 가차 없이 처형합니다.

이런 왕들 밑에서 백성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 백성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샬롬. 평강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요즘 지진과 테러, 각종 사고 때문에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불면증, 우울증,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을 때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의 십자가 날개 안에 거할 때 진정한 쉼과 평화가 있습니다.

7절을 봅시다.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세상 왕들의 통치는 한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높은 인기로 출발하지만 정권 후반부로 가면 부패하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언약의 성취자로서 그 나라와 왕권이 영원히 보존 됩니다. 영원토록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가능합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열심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15절부터 구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나서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침내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서 사탄의 권세를 박살내고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지금도 각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하셨습니다(요5:17). 우리는 주님의 뜻을 믿고 힘써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백성들에게 한 아기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큰 빛이 되셔서 모든 어둠을 몰아내십니다. 이 예수님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성탄절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심으로 어두운 내면이 밝아지고, 복잡한 인생문제들이 해결되며, 평강과 기쁨, 즐거움이 넘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