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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벧전4:7-11 (2018.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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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날짜1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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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벧전4:7-11
2018. 12. 2 주일 낮

어떤 랍비가 제자들과 함께 돈도 많고 유명한 사람의 장례식에 갔습니다. 장례식을 다 보고 온 후에 장례식에 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너희들은 무엇을 보았나? 굉장한 부자더군요. 장례식이 굉장하더군요. 너는 돈을 보았구나. 덕망이 높은가봐요. 조문객들이 구름 떼같이 모인 것을 보니 한평생 덕을 끼쳤나봐요. 너는 덕망을 보았구나. 야 그 관이 굉장하더군요. 그 돌 관이 얼마짜리예요. 너는 관을 보았구나.

제자들이 자꾸 물어봅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보셨나요? 나? 나는 죽음을 보았지. 다른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았으나 스승 랍비는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죽음을 보았습니다. 누구의 죽음을 보았습니까?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나도 죽겠구나. 지혜로운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금년도 마지막 달을 맞이하였습니다. 미국의 작가 오 헨리가 쓴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한 잎만 남은 나뭇잎처럼 한 장만 남이 있는 달력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지혜로운 자라면 내 인생에도 마지막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회를 하다보면 환자를 앞에 놓고 임종을 알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환자에게 임종의 시간을 알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편안하게 그대로 돌아가시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그 때 저는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남은 시간 죽음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시각장애와 극심한 가난을 딛고 미국에서 백악관 차관보의 자리에 올라 장애인 인권운동을 선도했던 강영우 박사님이 췌장암 선교를 받고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 편지는 세상과 담담하게 이별할 준비이자 그를 애도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강 박사는 ‘사랑하는 아내에게’라는 제목을 붙인 편지에서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라며 부인 석은옥 여사와 처음 만난 순간을 회상했습니다. 이어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는가”라며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것이….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라며 안쓰러운 심정을 전했습니다.

강 박사는 두 아들인 장남 진석 씨(폴 강)와 차남 진영 씨(크리스토퍼 강)에게도 “이제 너희들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내가 너희들을 처음 품에 안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들과 이별을 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하지만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너희들과 함께한 추억이 내 마음 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라며 작별의 위로를 전했습니다.

이어 “해 보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자라준 너희들이 고맙다.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내가 떠나더라도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들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 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 걱정도 없단다. 나의 아들 진석, 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한다”고 격려했습니다.

진석 씨는 워싱턴포스트가 ‘슈퍼닥터’로 선정한 유명 안과 전문의이며, 진영 씨는 백악관 선임법률고문으로 활동했습니다.

여러분, 끝을 아는 것은 지혜요 축복입니다. 종말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입니다. 지혜롭게 정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칭찬 듣고 살았다 할지라도 주님 재림하시는 날 들림 받지 못하면 망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지옥에 가는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종교입니다. 신앙은 종말 승리의 약속입니다. 교회는 종말로 나아가는 구원공동체입니다. 성경은 종말로 나아가는 지침서입니다. 예수는 종말 구원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헤겔은 “지금 인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나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지금 세계 역사는 성경을 증명하는 역사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엄청난 사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건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사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수많은 위대한 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건이 있다면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시게 될 재림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종말이 무엇입니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진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눅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키에르 케고르의 종말 비유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초만원을 이룬 극장 밖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들 중 누군가 불이야~ 소리를 지른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발에 밟히고 불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여 헤매게 될 것이다 생각하고 한 배우가 연극을 중단하고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차분하고 진지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밖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갑자기 서둘러 뛰어나가다 보면 우리 모두 죽습니다. 출입구는 뒤에 있고 좌우에 하나씩 있습니다. 출입구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차례대로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내려가시면 어디에 불결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주로 어느 방향으로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연극인 줄 알고 박수를 치고 좋아하고 웃고 떠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연기가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불길이 순식간에 극장 안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때는 늦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종말 종말, 말세 말세 하니까 위기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좀 더 충성하라고, 재미있으라고, 연극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의 사위들이 농담한다고 그랬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방주를 짓는 노아를 향하여 손가락질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도적이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갑자기 찾아오듯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가꿀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십니다. 인간농사 짓는 농부이십니다. 구원농사 짓는 농부이십니다.

추수 때가 되면 참새 떼가 날아들어 알곡을 먹으려고 몸부림치겠지요.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서 덤벼들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거짓 선지자, 물질주의, 세속주의, 쾌락주의, 안일주의 참새들이 이 시대에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추수 때가 된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시간을 노아의 때에 비유하셨습니다.
마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는 일이 잘못되었습니까?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전부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방주 문이 닫힐 때 까지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반드시 불행하게 됩니다.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됩니다.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날마다 승리하고 다 형통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노아의 사건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노아가 야훼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이 이성에 맞건 맞지 않건, 상황에 맞건 맞지 않건, 손해를 보건 보지 않건,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건, 듣지 않건 상관없이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선한 행동을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받은 명령은 너무나 황당무계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황당무계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의 이성과 상식, 경험에 맞지 않는 일을 시키십니다. 노아에게 산에다 방주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방주는 우리가 쓰는 정식 농구장의 20배 정도 되는 크기입니다. 축구장 길이보다 더 깁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방주를 산에다 지으라는 것입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배를 바다에 짓지 산에다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산에 지었습니다. 그것도 120년 동안 변함없이 순종합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누가 못 믿습니까? 하나 더 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것, 이걸 믿는다고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것,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믿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그룹의 사람들을 봅니다. 먼저 노아와 그의 가족입니다. 그들은 왜 구원을 받았습니까?

첫째,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겠다고 하셨을 때 노아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노아 때에 물로 심판하신 것처럼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의의 심판을 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방주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요, 심판의 사실성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산에다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저 같으면 ‘하나님, 방주를 짓기는 하겠는데 바다에 짓겠습니다’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산에다 지으라고 했으면 산에다 지어야 합니다. 순종하는 데 토를 달아서는 안됩니다. 노아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 승리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노아에게 있어 또 한 가지 어려운 문제는 심판이 언제 있는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기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방주를 짓습니다.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방주를 짓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충성스럽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보건 보지 않건, 박수를 쳐주건, 비방하건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농구장 보다 20배 큰 방주를 120년 걸려 완성했습니다. 600세에 방주를 다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 짓고 나면 무슨 일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창7장에 보면 그런 말도 없습니다. 짓자마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짓고 나서 노아가 또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7:1에 들려옵니다. “노아야, 방주에 들어가라” 방주를 누가 지었습니까? 노아가 지었습니다. 누가 명령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까? 방주 덕분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 성령 충만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방주입니다. 이렇게 하려고 하면 남편이 반대하고, 자식이 반대하고, 이웃이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창7:1 후반부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이 사람이 노아입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렸고, 그렇게 오래 참았고, 그렇게 오래 수모를 당하였지만, 그런 수모와 아픔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들, 마지막 때를 사는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당시 노아의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큰 방주를 산에다 지었으니 장안에 소문이 안 날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1, 2년만 지은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렸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핍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노아는 심판에서 구원받았지만, 노아의 행위를 비웃었던 사람들은 결국 다 홍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노아의 친구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심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지 않고 조롱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징조는 롯의 때입니다.
눅17:28-30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얘기입니까? 아닙니다. 천사가 소돔을 멸하려고 온 그날에도 그 땅을 심판하겠다는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룻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여긴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심판을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롯의 시대처럼 성의 타락을 찬미하는 성 혁명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사랑하는 종말의 징조입니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 성적인 쾌락, 눈으로 보는 쾌락, 안목의 정욕, 이런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무서운 세계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되면 마지막 때가 된 줄로 알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마지막, 단순히 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완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산의 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마지막 때에 관한 기록이 300번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연구하고 보니까 예수님의 보혈에 관한 기록보다도 마지막 때에 관한 기록이 더 많다고 얘기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정신을 차리라 - 보초가 눈을 부릅뜨고 살피듯이 살아가라는 얘기입니다. 한밤중에 보초를 서는 사람이 잡지책이나 뒤적거리고 비실비실 웃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신하라”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잠결에 어물어물 시간을 보내지 말고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될 일, 중요한 일, 덜 중요한 일, 귀한 일, 덜 귀한 일을 구별하고 살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교회에 신실한 한 여신도가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몸이 이상해서 진찰을 받아 본 결과 간암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처음엔 하도 실망이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남은 두 달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푼푼히 모아둔 유산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지 헌신해야지 하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하나님 앞에 마음껏 드려보지 못했습니다. 얼마를 잘라 하나님 앞에 헌금했습니다.

처녀시절에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선교사로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돈 벌어 보내는 선교사라도 되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관계를 맺고 기도하고 있던 선교사에게 얼마간의 헌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다시 한장 두장 읽어 내려가며 아이들에게 유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화해할 사람을 찾아가 화해를 했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서 사랑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후딱 두 달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죽을 시간이 다 되었나 보다 생각을 했는데 전혀 이상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힘이 용솟음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찾아가서 다시 검진을 해보았더니 의사의 얘기인 즉 지난번에 간암이라고 진단한 것은 오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오진이었는지 어니면 그 사이에 기적처럼 병이 나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무튼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오진으로 돈을 많이 써버렸으니 후회가 되지 않습니까?” 이 부인의 대답입니다. “아니오, 지난 두 달처럼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 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땅에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종말의식이 예민했던 시대는 언제나 진실하고 성실하고 깨끗했던 시대였습니다. 믿음이 살아있던 시대였습니다. 믿음이 건강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종말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시대는 언제나 병든 시대였습니다.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시대였습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의식이 예민한 성도들은 건강한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속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병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을 준비하지 못한 비극적인 삶을 마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오 하나님 오늘밤에 하나님이 오시겠습니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홀연히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주를 맞이하라! 외칠 때에, 여러분 모두가 깨어 있어 그 소리를 듣고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복된 교회,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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