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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다른 사람들 히11:13-16 (2018.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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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날짜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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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다른 사람들 히11:13-16
2018. 9. 23 주일 낮

고향!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입니다. 특히나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훨씬 더 친숙합니다. 그래서 명절 때만 되면 민족의 대 이동이 이루어집니다.

한국에는 벌써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 내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 세계 유대인들 또한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왜냐고요?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초막절이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초막절만 되면 함께 모여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가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다른 절기 때에는 못 가더라도 큰 명절인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지금도 초막절이 되면 옛날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찾아서 1주일간 초막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태양력을 쓰는데 한국과 이스라엘은 태음력을 사용합니다. 한국의 추석은 음력으로 8월 15일입니다. 바로 내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7월 15일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7월 14일 해질 때부터입니다. 이스라엘의 태음력은 한국의 태음력과 대체로 한 달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금년에도 한국의 추석과 초막절이 같은 날이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한국이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을 사람들이 명절에 고향을 찾기 위해 기차표를 사려고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한국사람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명절이 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드릴 선물을 마련하여 양손에 들고 기차와 고속버스를 타고 가곤 했습니다. 어떤 기업에서는 고향을 찾는 직원들을 위해서 선물과 전세 버스를 마련해 주는 흐뭇한 기사가 신문에 나기도 했습니다. 한국 경제가 좋아지면서 부터는 고향에 가는 풍속도가 바뀌었습니다.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에 선물을 싣고 고향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인하여 명절만 되면 고속도로가 막히고 정체 되었습니다.

흔히들 고향이라 하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사용을 합니다. “내 고향은 바닷가이다. 농촌이다. 두메산골이다.”라고 말들을 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아끼고 자랑 합니다.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은 임진각이나 통일전망대에 올라가서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고향이 너무나 그리워서 향수병에 걸린 사람도 있고, 못 가는 고향을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고향은 그런 고향이 아닙니다. 즉 다른 고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갈망하고 애타게 그리는 고향은 과거에 그들이 살았던 곳이 아닙니다. 명절이면 가보고 싶은, 그리움과 추억이 담겨져 있는 곳도 아닙니다. 옛 친구와의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있는 그런 곳도 아닙니다.

그들이 갈망하고 애타게 그리는 고향은 앞에 있는 곳 그리고 그들이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나아가고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히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여기에서 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였는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그들을 불러서 떠나라고 하신 이래 그들은 갈대아 우르를 더 이상 고향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더 나은 고향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모한 곳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는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고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벤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됩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소속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에게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살고 있어도, 바로 왕의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구원받은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어도 이 땅의 백성이 아닌 천국 백성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것인 부귀, 영화, 재물, 명예에 매일 것이 아닙니다. 왜냐고요? 이 땅은 머무를 곳이 아니라, 언젠가는 다 두고 떠나야 할 땅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CEO 징기스칸이라는 책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징기스칸은 8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지혜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징기스칸이 새롭게 조명된다는 것입니다. 요점은 유목민처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유목민은 한 번도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습니다. 가축이 풀을 다 뜯어먹으면 옮겨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다 유목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유목민으로 살았습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저기를 옮겨가며 살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질 때.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먼저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쪽은 비옥한 땅이고 한쪽은 척박한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마음 중심에 내가 어딜가면 어떠냐?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되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되지,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그건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래서 가치관이나 세계관 인생관이 독특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예수 믿는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교회 가는 잠도 안자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진짜 교인입니다, 남 좋아하는 것 좋아할 것 없습니다. 남들이 좋다고 미치는 것에 미칠 것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상한 사람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행인과 나그네의 삶을 산 믿음의 조상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1. 미완성을 수용하며 살았습니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 약속의 실현을 이 땅에서 다 경험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이 땅에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 약속의 실현은 먼 후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지만 다 이루어짐을 보고 세상을 떠난 것을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장차 이루어질 약속을 믿으면서 기쁨으로 인생의 미완성도 수용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믿음이란 말씀입니다.

믿음이란 장차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지만 지금 당장 나의 때에 다 이루지 못해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믿으면서 여전히 기뻐할 줄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해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믿음의 조상들은 미완성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나그네 길에 불과한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 당대에, 그리고 이 땅에서 모든 약속을 다 성취하고 모든 축복을 다 누리고자 한다면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장막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떠나온 본향을 향해 뒤돌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뒤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11:9-10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여기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큰 민족의 비젼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예비되어 있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상급을 의미합니다.

내 당대에 하나님의 축복이 다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내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생각하며 아브라함은 현재 이곳에서 장막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16절을 봅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상을 사모했기 때문에 기쁨으로 이 땅에서 나그네 인생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이로 보건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먼 후대를 생각하는 역사적인 믿음이요, 본향을 사모하는 종말론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다가도 쉽게 넘어지고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축복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내 당대에 모든 축복이 다 이루어지기 원하는 자기중심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꽃은 역사가 지난 후에 피어나고 그 열매는 하나님나라에서 최종적으로 따 먹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16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가장 큰 축복은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자식 이삭 하나만 낳고 장막 생활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그의 하나님 되심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까?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실 때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정도가 아니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위하여 낙원을 예비해 주셨던 것입니다.

눅16:22-24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이 세상에서도 갑부들은 수천평, 수 만평의 집을 짓고 별의 별 것을 다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영원히 살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두고 떠나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큰 집에서 산다고 건강해지고 행복해지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는 근심 걱정, 아픔과 고통. 슬픔과 괴로움,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먼 후대를 바라보는 역사적인 믿음이 있을 때에 좀 고생이 될지라도 내 당대에 기꺼이 희생하는 삶, 장막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2. 소망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약속의 성취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성취를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항상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을 어렵게 사는 것 같아도, 꿈과 믿음을 가지고 항상 소망 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과 소망이 확실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꿈과 소망은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은 이루어 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시고, 예수님이 그 약속을 십자가 안에서 인을 쳐주셨고, 성령으로 보증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확신하기에 오늘을 꿈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딤후1:12 이를 인하여(복음을 위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도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땅에서 고난이 많았어요? 없었어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삶을 불행한 삶입니까?
행26:29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무엇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와 같은 고백을 가능케 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와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영원한 성,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은 잠깐이요, 천국에서의 삶은 영원합니다.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롬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소망을 가지고 삽시다. 약속을 붙들고 삽시다.

3.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살았습니다.

히11:14-16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 말씀의 뜻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이 나그네 생활이 힘들고 고단해서 고향인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가 있었지만 그 고향보다는 더 나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기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모시고 살아가는 인생 나그네 삶이 힘들고 고단해서 언제라도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있지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기에 결코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은 사는 방식이 다릅니다. 캐나다 출신의 Dr. William Hall이라는 선교사는 퀸즈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1891년, 한국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그는 선진국 캐나다의 의사로서 얼마든지 여유 있게 살 수 있었지만, 31살의 젊은 나이에 가난하고 미개한 한국 땅에 의료 선교사로 왔습니다. 그러나 2년 뒤인 1893년 갑자기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조선 땅은 전쟁부상자들과 전염병환자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William 선교사는 밤낮없이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서 34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국에 온 지 3년만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첫 아들 Sherwood Hall은 겨우 첫 돌이 지난 상태였고, 둘째 딸 에디스는 그의 아내 로제타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Dr. William Hall. 그가 만약에 믿음을 현세적인 축복으로만 생각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이방 땅 조선에서 젊은 나이에 자신의 육신의 장막을 벗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가난하고 미개한 이 은둔의 나라 조선이 장차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역사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이 땅에서 가족들과 더불어 장막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미망인 로제타는 계속해서 조선 땅에 남아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워서 의료봉사를 계속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슈바이쳐라 불리는 장기려 박사도 바로 그 기홀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원장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사랑하는 딸 에디스가 이질로 죽는 또 한번의 슬픔이 찾아왔지만 로제타의 헌신은 계속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죽을 때 겨우 한 살을 넘겼던 아들 Sherwood가 고향으로 돌아가 토론토 의대를 졸업한 후 1926년, 33살의 나이에 또다시 조선 땅에 의료선교사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 결핵환자를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요양원을 세우고, 193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추방이 된 후에도 23년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접경지대의 고지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9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 땅 양화진 묘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의 인생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 그것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고향이 다른 사람은 관심사가 다릅니다. 이 땅에서 다 가지려, 다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상을 바라보기에 미완성을 수용하며 삽니다.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삽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은 너무나 현세적인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오직 우리 당대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믿음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믿음,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배워서 이 땅에서 나그네 철학을 가지고,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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